[서평] 시오노 나나미의 르네상스 여인들

@s.maeda(higep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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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 이 책의 성분에 관하여

‘머리말’ 이나 ‘후기’ 는 언뜻 보기에는 독자를 위해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저자를 위해 있는 것이라고 빅토르 위고라는 위대한 선생이 ‘크롬웰’ ‘머리말’ 에서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그렇다. 저자는 수백 쪽이나 되는 본문에서 자신의 의도를 충분히 썼을 터인데, 독자의 이해력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신의 문장력에 불안을 느끼기 때문인지, 이 책은 이런 의도로 쓴 것이니까 독자들이 그것을 알아주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듯이 일부러 다시 한번 독자 앞에 레일을 깔아주는 것이 대개의 ‘머리말’ 이 갖고 있는 공통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후기’ 에서 이 책은 이러이러한 의도로 이러이러한 고생 끝에 쓴 것이라고 무슨 미련이라도 남은 것 마냥 말하는 것이 보통이다.

이렇게 말하면 ‘머리말’ 의 효용성 따위는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위고 선생은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말’ 이 반드시 쓸모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독자들은 그 책을 구입함으로써 돈과 시간을 투자하려 하고 있으니까, 투자 대상이 어떤 기반 위에 서 있는지 정도는 미리 알 권리가 있다. 과연 당연한 논리다. 위고가 살았던 시대의 서점에는 의자가 놓여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상상하자 묘하게 우스워졌다.

저혈인 나는 아무리 먼 거리를 걸어도 괜찮지만, 한 곳에 계속 서 있으면 10분도 지나기 전에 기분이 나뻐진다. 그런데 의자가 놓여 있는 서점은 본 적이 없으니까, 나에게는 책을 고르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이 아주 중대한 문제다. 계속 서 있는 것만 괴로운 것은 아니다. 담배 한 대 피우려 해도 재떨이가 놓여 있는 서점은 찾아볼수 없고, 서점에 서서 조금 오래 책을 읽었나 싶으면 점원이 볼일도 없는데 주위를 얼쩡거리기 시작하여 내 정신을 산만하게 만드는 것밖에 생각지 않는 것 같다. 같은 종류의 책들을 비교해보고 싶어도, 책을 이리저리 움직이면 곤란하다고 점원한테서 당장 항의가 들어오니까 그것조차 불가능하다.

이렇게 되면 신경이 상당히 굵은 사람이 아닌 다음에야 남은 방법은 딱 하나뿐이다. 무조건 저자를 믿고 사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유명작가도 아닌 내가 내 이름만 믿고 사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뻔뻔스러운 정도가 아니라 비현실적이다. 그러니, 본문은 이런 성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정도는 말해주는 것이 독자에 대한 최소한의 서비스가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게 되었다. 하다못해 비스켓도 밀가루,설탕,버터,달걀,바닐라,소금 같은 성분이 포장 상자에 명기되어 있지 않은가,그것을 본받아 ‘르네상스 여인들’의 성분표를 만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정략결혼 8,전쟁 2, 약탈 2, 암살 6, 간통 4, 감옥 2, 강간 1, 처형 4, 그리고 권모술수는 부지기수.

이것이 15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초까지의 기간에 살았던 네 여자를 축으로 하여 전개된다.

저자가 이런 악업에만 관심이 있어서 일부러 그것만 다룬 것은 아니다. ‘제3의 사나이’라는 오래된 명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제3의 사나이로 나온 오손 웰스가 이런 말을 했다.

“당신은 나를 악당이라고 비난한다. 그러나 수백년 동안 평화가 이어진 스위스는 뻐꾸기 시계를 만들었을 뿐이지만, 보르자 같은 사람들이 온갖 악행을 저질렀다고 비난받는 르네상스 시대에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에 의해 위대한 문화가 꽃을 피웠잖는가.”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는 버틀런트 러셀처럼 머리좋은 남자도 모르겠다고 말했으니까, 나 같은 사람이 알 리가 없다. 하지만 긴가을밤에 아무것도 할 일이 없으면 그 문제를 한번 곰곰 생각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여기까지 읽는 데 기껏해야 2분 30초밖에는 걸리지 않을 것이다. 기분도 나빠지지 않고 점원한테 신경을 쓸 필요도 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할 결심이 섰다면, 이 ‘머리말’ 은 비로소 저자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1973년 늦여름, 피렌체에서

  •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중에 하나이면서 나의 좌우명인 꿈도 없이 두려움도 없이 을 정하게 된 시오노 나나미님의 르네상스여인들 중에서. 머리말 조차도 이렇게 위트가 넘치다니. 최근에 점심에 밥을 먹고 분당 도서관에 가서 로마인이야기를 읽고 있다. 에전같았으면 아메리카노나 마시면서 시덥지 않은 이야기나 떠들었을텐데. 그래도 조용한 도서관에 책을 읽다보니 머리가 정리되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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