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래티넘의 #3776 센추리 부르고뉴 만년필

대놓고 물어보는 사람은 없지만 왜 나에게 만년필 리뷰를 하면서 만년필에 대해서 반감어린 투로 글을 쓰는지 궁금해 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첫째는 다음의 펜후드에서 만년필 애호가들의 어처구니 없는 폐쇄성을 겪으면서 좋게 볼 수 없었고, 두번째는 대부분의 어린 문구류 마니아들이 샤프펜슬로 시작한 취미를 만년필로 접어들면서 만년필을 최고의 필기구로 취급하는 단편성때문이다.

만년필이 필기구의 끝판왕이냐? 그건 아니다. 필기구의 끝판왕은 Uni의 제트스트림이다. 최근 우리나라에서 만년필에 대한 신규 진입 인구는 정체 또는 하락하고 있다. 값싸고 품질 좋은 일본 만년필을 쉽게 구매할 수 있음에도 아직도 만년필은 불편하고 비싸다라는 선입견이 강하다. 그리고 불편하기때문에 라도 만년필을 필기구의 끝판왕이라고 부르기 힘들다.

오늘 소개할 플래티늄의 #3776 센추리는 파이로트,세일러와 함께 일본을 대표하는 만년필 전문회사의 베스트셀러 만년필이다. #3776은 일본의 후지산의 높이를 숫자로 표시한 건데. 이 점때문에 만년필 애호가들 사이에서는 카피천국 일본이라는 오명을 받고 있다. 몽블랑의 닙에 새겨진 4810은 몽블랑 산의 높이를 뜻하기 때문이다. 이야기만 들었지만 #3776 부르고뉴의 와인을 닮은 자주색의 데몬바디( 안이 비치는 바디 ) 도 몽블랑을 카피했다고 #3776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3776

일본 만년필은 독일의 몽블랑이나 펠리칸같은 곳과는 전혀 다른 필기감을 준다. 만년필 애호가들이 말하는 만년필의 특징들. 넘치는 잉크 흐름과 큰 글씨에는 적합하지 않다. 허나 일본 만년필은 한국과 일본같이 획이 많은 글자에 훨씬 더 적합하다. 알파벳 위주의 유럽이나 미국과의 필기패턴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

나도 꽤나 다양한 만년필을 가지고 있고, 내 손에 맞는 펠리칸의 M405를 아직도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0.3mm 샤프펜슬이나 하이테크를 꺼려하는 나의 필기습관의 변화때문에 펠리칸을 더 선호하는 것이지, 필기량이 많은 학생들에게는 펠리칸의 만년필은 다소 굵은게 사실이다.

.#3776 센추리는 플래티늄의 가장 인기 있는 만년필 서브 브랜드 중에 하나다. 그 인기의 이유는 #3776의 캡에 닙을 강하게 눌러주는 스프링을 넣어 뚜껑을 닫으면 잉크를 마르지 않게 하는 기능때문이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만년필은 매우 손이 많이 가는 필기구다. 한달 정도만 잉크를 넣고 쓰지 않으면 잉크가 안에서 굳어버린다. 오래간만에 서랍에서 꺼낸 만년필로 필기가 안되는 경우는 매우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3776은 최대 1년 정도까지 사용하지 않고 있어도 잉크가 안에서 굳지 않는다. 캡에 장치된 독특한 압력장치때문이다.

#3776

.#3776의 또다른 특징은 UEF까지 있는 닙의 다양성이다. UEF는 하이테크 0.3mm에 버금가게 얇은 필기가 가능하다. 내가 구매한건 ef닙인데, 0.4mm보다 얇게 써진다. 이렇게 얇게 써짐에도 #3776의 필기감은 매우 부드럽다. 그 이유는 14k라는 금촉을 사용했다는 점과 대형닙때문이다. 만년필 리뷰에서는 “낭창낭창” 이라는 말을 자주 사용한다. 샤프펜슬에서는 낭창낭창대신에 “유격” 이라고 말하는데, 둘다 닙(촉)이 흔들리는걸 말한다. 만년필의 경우 연성의 금촉의 경우 필기시 닙이 살짝 살짝 휘는 느낌이 나는데. 샤프펜슬의 유격과 달리 이렇게 휘는 느낌은 필기시 극도의 부드러움을 선사한다. 그리고 이런 필기감은 닙이 클 수록 14k보다는 18k닙에서 더 쉽게 발견할 수 있다.

#3776

투명한 데몬바디는 아니지만, #3776 부르고뉴는 와인색을 닮은 자주색을 띠고 있다. 캡은 돌려서 뺄 수 있다. 사실 문외한이 보면 이 만년필은 그렇게 고급스럽게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필기를 해보면 이 만년필의 진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오래 사용할수록 잘 굳지 않는 잉크에 감탄을 하게 된다. 필기감과 편리성 두가지 토끼를 다 잡은 만년필이다.

#3776

일본에서는 보통 만엔(15만원)정도를 만년필 메이커의 주력 만년필로 꼽고 있다. 14k닙을 사용할 수 있는가격대이기 때문이다. 이 위로 올라가면 닙의 완성도 보다는 바디의 고급화때문에 가격이 올라가는 경우가 많다. 물론 플래그멘쉽 만년필의 경우 닙 자체가 더 좋을 순 있지만, 통산 만엔 정도의 만년필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만년필 취미를 시작하는걸 권하고 있다.

#3776

수미에shop에서는 #3776 M사이즈를 연하장에 쓸 글씨로는 최적화됐다고 설명하고 있다. M정도면 0.6에서 0.7mm정도의 두께일 듯 한데, 이 정도의 두께가 보통 성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글씨 두께기때문에 수미에의 설명이 맞을 듯 싶다. 나도 EF보다는 F나 M닙으로 구매할껄. 이라는 생각을 종종하고 있다. 내가 쓰기에는 다소 얇다.

#3776

만약 제대로 만년필을 시작하려는 분들이라면 #3776 센츄리 부르고뉴의 F또는 M닙을 추천한다. 사실 이정도의 퍼포먼스를 느끼려면 펠리칸에서는 M405정도를 써야 하는데, 이 만년필보다 적게는 2배에서 보통 3배 가까이 하는 가격이다. 잉크도 잘 마르지 않고 편리하게 쓸수 있음은 물론이고 특유의 하트모양의 대형닙때문에 필기감은 부드러운편에 속한다. #3776을 사용하면서 부족한점은 조금 더 상위 기종이나 타 브랜드 만년필을 사용하면서 커버가 가능할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가끔은 #3776의 필기감이 떠오를 것이다. 기본에 충실한 필기구는 항상 향수를 불러일으키니 말이다.

write by 2012.12.09 20:41

PS. #3776은 5년이 넘게 쓴 지금도 잘 사용하고 있는 만년필이다. 대형닙이 주는 필기감은 묘하게 마음을 안정시킨다. 최근에는 다양한 색상(데몬 버전)으로 발매하고 있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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